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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27. <부정공>학생공휘기운묘표(學生公諱淇運墓表)
1. 문헌 목록 〉21. 21世 〉29. <부정공>자헌대부공조판서월파공휘병기행장(資憲大夫工曹判書月波公諱秉琪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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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부정공>동중추공휘광현가장(同中樞公諱光鉉家狀)
同中樞公諱光鉉家狀 公諱光鉉初諱秉贇字德秀號錦堂玉川趙氏始顯于高麗中葉光祿大夫門下侍中諱璋三傳諱元吉號農隱封玉川府院君諡忠獻與圃牧陶冶爲道義交時稱五隱享武夷院諱瑜號虔谷官副正行通喪制守罔僕義入杜門洞言志曰首陽山月照我心肝朝家旌忠孝士林享爼豆諱崇文號竹村官節度使 贈兵判諡節愍諱哲山號龜川官敎官 光廟丙子與六臣同被禍並享 肅慕殿庭後有諱夏亨雲山郡守吏畏民懷立石頌德寔七代以上也曾祖諱基賢號晚悟 贈司僕寺正從宋性澤遊道學行義爲世推重祖諱鎭豊 贈承政院左承旨考諱邦浩壽階通政 贈嘉善大夫工曹參判妣貞夫人木川張氏忠毅公潤后璟女府君生于金谷里第 哲宗戊午七月十九日也生而質美賦性溫直儀容端重寡言笑謹動止通政公三十四歲晚生故鍾愛之敎有法度至微細事無毫分放過殆若成人也既長家貧親老恐闕旨養苦於田園勞於漁樵服勤無方量入計出禁奢華家道漸振餘力學文藝業日新諸僚稱歎其莫及也甲辰四月二十七日遭通政公喪哭泣不絶曰少傷乎貧未克忠養不孝莫大也送終之節一遵慮制誠得吉地使安體魄爲人子之道也古書不云乎爲人子者不可不知醫工堪輿之術亦可也精思深究誠力求之而爲永世之寧日上于墓不以寒署風雨或廢每當夫日粢盛務令豊潔臨祭哀痛如袒括時必致著存之誠也癸丑十一月二十二日又遭貞夫人喪哀毀踰禮白首居喪哀慕益切矣甲歲生朝家衆謹倣涑水公家獻壽之儀節前期而告甲申命戒曰是爲具慶下入之事也方今國喪普通縞素在身風樹之痛倍切於他時也泫然而牢拒承命袛票不遂其情畧設小酌而止實程叔子安惡爲樂之訓也往在辛壬及癸宗議齊發修大同譜府君總財務周密經書矣事巨才渴必也難免九仭山一簣土之功虧府君大爲憂懼與二三宗人終始賢勞傾私財而竣功是不爲重義輕財之一道耶可警徇欲而喪倫者也己巳冬月廣州橋成開落飮衆論皆三代俱存之福家人先行焉則橋亦久久存榮也多數官民續續來懇府君固辭不獲烏帽綠袍攝威儀而序行冬天和氣藹然滿橋觀者如堵爭賀曰冬暖如春天感福翁之好德頌源源慶福矣宗家家勢蕭條先廟祀事累年攝奉自先塋及親墓伐石而具儀物置田而助祭奠是亦追遠而誠篤也壬午秋偶有不安節禱藥無效竟以天年考終于十二月二十五日享年八十五壽階嘉善同中樞遠近莫不嗟悼曰賢人死也葬于住岩面金谷村靑龍嶝路下丁坐原配貞夫人高靈申氏永求女孝養舊姑敬承君子宗黨咸稱婦德甲寅十月二十六日生辛未三月八日卒墓住岩面斗旨洞下粉箱洞先塋下丑坐原育二男三女男源永源會女竹山安圭捀濟州梁在瞻慶州鄭炳琪孫相魯相皛草溪鄭聖模妻長房出相譔相識相徹高興柳昌彰次房出曾孫亮勳泰勳商勳東勳濟州梁東椿光山金熙洙相魯四男二女誠勳慶州鄭炳貞相皛一男一女玄孫成翼珣翼翼中亮勳三男餘不盡錄嗚呼府君爵階二品壽踰八旬望重一鄕殆鄒聖所謂三達尊之君子人也宅心以敬律身以禮容物有量謀事察機府君茂德懿行眞是罕世之資也噫滄桑易處彛倫頹墜若未今日闡揚焉則遂恐來百無傳獲罪於不知不明之訓故敢述過庭睹聞之萬一窃惟秉筆君子採擇焉而修潤泣血祈懇之至 曾孫男 亮勳 謹狀 동중추공휘광현가장(同中樞公諱光鉉家狀) 공의 諱는 광현이요 初諱는 병빈이며 자는 德秀고 호는 錦堂인데 玉川趙氏였다. 고려 광록대부 휘 璋을 상조로 三대를 내려와 충헌공 휘 元吉의 호는 農隱이요 옥천부원군에 시호는 忠獻인데 圃牧陶冶와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니 당시에 五은이라 칭소하고 武夷院에 배향되었다. 휘 瑜의 호는 虔谷이요 벼슬은 부정으로 通喪制를 행하며 불사二군의 지절을 지켜 두문동에 들어가 뜻을 말하되, 『수양산 달이 내 간담에 비친다.』 하니 나라에서 충효 정포를 내리고 士林이 사우에 배향하였다. 휘 崇文의 호는 죽촌이요 벼슬은 절도사로 병조판서 증직을 받았고 시호는 節愍이며, 휘 哲山의 호는 귀천이요 벼슬은 교관으로 世祖 병자(一四五六)년에 六臣과 더불어 같이 화를 입고 함께 肅慕殿殿에 배향되었으며, 휘 夏亨은 雲山 군수로 아전은 두려워 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비를 세워 덕을 사모하였으니 곧 七대 이상이었다. 증조 휘 基賢의 호는 晚悟요 증 사복시정으로 宋性澤과 종유하여 도학과 행의가 당세의 추중을 받았으며, 조 휘 鎭豊은 증직 승정원 좌승지요 考 휘 邦浩는 수직 통정으로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이요, 妣 정부인 목천장씨는 충의공 윤의 후손인 경의 따님이었다. 哲宗 戊午(一八五八)년 七월 十九일에 부군이 금곡리 본제서 출생하였는데 나면서 바탕이 아름답고 천부의 품성이 온화·정직하며 거동과 용모가 단정하고 묵중하여 말과 웃음을 적게하고 움직이고 그치기를 삼가하였다. 통정공이 三十四세때 늦게 얻은 아들인고로 크게 사랑하여 법도있게 가르치고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추호도 방임한 일이 없으니 자못 成人 같았다. 이미 장성함에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어 좋은 반찬을 떨어뜨릴까 두려워하여 밭갈고 농사짓기를 힘쓰고 고기잡고 나무하며 간단없이 부지런히 하여 들여온 것을 헤아려 내보내고 사치를 금하니 家道가 점차 풍요하였다. 갑진(甲辰)년 四월 二十七일에 통정공 상사를 당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되 『젊어서 가난에 시달려 능히 풍후한 봉양을 못한 것은 불효막심한 일이로다 보내고 마치는 절차를 한결같이 예제에 따라하고 지성을 다하여 좋은 자리를 얻어 영혼을 편안히 하는 것이 인자의 도리다.』 하였다. 옛글에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사람의 자식된 자 가히 의원, 공장, 지사의 방술을 알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이 또한 옳은 말이로다. 정밀히 생각하고 깊이 연구하며 지성을 다하여 구득하여 영세에 편안히 계시게 하리라 하고 날마다 묘소에 성묘하고 한서 풍우에도 폐하지 아니하였다. 매양 제일을 당하면 제수를 풍족하고 정결하게 하기에 힘쓰고 제사 때에는 초상 때와 같이 애통하여 반드시 살아 계신것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계축(癸丑)년 十一월 二十二일에 또 정부인 상사를 당하여 애훼함이 예제를 넘어 백수 거상에 슬퍼하고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환갑날 아침에 집안 식구가 삼가 涑水公 집안의 헌수한 의절을 모방하여 앞당겨 고하니 얼굴을 펴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경계하되, 『이는 부모가 다 계신 사람의 한 일이요 방금 국상중이라 백의 백립이 몸에 있고 또 돌아가신 어버이 생각이 다른 때보다 배나 더 간절하다.』 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거절함으로 명령에 따라 그 정을 이루지 못하고 약간의 주효로서 마쳤으니, 실로 정숙자(程叔子)의 마음을 편안히 하여 즐거움을 취하라는 훈계를 따름이었다. 지나간 신임(辛壬)년에 대동보를 편수 하자는 종의가 제발하여 부군이 재정을 총책하고 주밀하게 경획하였으나 일은 크고 힘은 적어 결국 아홉길산에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는 과오를 범할까 부군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두서너 종인으로 더불어 처음부터 끝까지 어질게 수고하고 사재를 기울여 준공하니 이것이 의리를 중히 하고 재물을 가볍게한 도리가 아닌가? 가히 사리 사욕을 따라 천륜을 잃어버린 자를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기사(己巳)년 겨울에 광천 다리가 낙성되니 여러 사람이 다 말하기를 三대 구존한 복가의 할아버지가 먼저 건너면 다리가 오래 보존된다 함으로 관민 다수가 찾아와 간청함에, 부군이 굳이 사양하다가 할 수 없어 검은 갓과 푸른 도포로 위의를 차리고 서서히 건너감에 겨울날 구름이 피어 오르듯 다리에 가득하니 보는 자 구름같이 몰려들어 하례하되 『겨울이 봄날같이 따스하니 하늘이 복옹의 좋은 덕을 감응하고 깊은 경복을 송축함이라.』 하였다. 종가집이 가난함으로 사당 제사를 여러해 동안 섭행하고 선영으로부터 친산에 까지 돌을 깎아 의물을 세우고 제위토를 사서 제전을 도우니 이 또한 추원 감모한 정성이 지극한 때문이었다. 임오(壬午)년 가을에 우연히 편안치 못한 증후가 생겨 빌고 약써도 효험이 없이 마침내 천수로서 十二월 二十五일에 향년 八十五세로 고종하시니 가선동중추(嘉善同中樞)의 수직을 받었고 원근 사람이 슬퍼하여 말하되, 『어진 사람이 가셨다.』 하였다. 주암면 금곡면 청룡등 노하 정좌원(金谷村青龍嶝路下丁坐原)에 안장하였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고령신씨(高靈申氏) 영구(永求)의 따님으로 시부모를 효도로서 봉양하고 군자를 경대하니 종족이 다 부덕을 칭도 하였다. 갑인(甲寅)년 十월 二十六일에 출생하여 신미(辛未)년 三월 八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주암면 두지동 하분상동 선영하 축좌원(斗旨洞下粉箱洞先塋下丑坐原)에 모시었다. 아들은 원영(源永)·원회(源會)·요, 딸은 죽산(竹山) 안규봉(安圭捀)·제주(濟州) 양재첨(梁在瞻)·경주(慶州) 정병기(鄭炳琪)의 처며, 손자 상노(相魯)·상효(相皛)·초계(草溪) 정성모(鄭聖模) 처는 큰아들 소생이요, 상선(相譔)·상식(相識)·상철(相徹)·고흥(高興) 유창창(柳昌彰) 처는 둘째아들 소생이다. 증손 양훈(亮勳)·태훈(泰勳)·상훈(商勳)·동훈(東勳) 제주(濟州) 양동춘(梁東椿)·광산(光山) 김희수(金熙洙) 처는 상노의 四남二녀요, 성훈(誠勳)·경주(慶州) 정병정(鄭炳貞) 처는 상효의 一남一녀며, 현손 성익(成翼)·익중(翼中)은 양훈의 세 아들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 아니한다. 아! 부군이 벼슬 자리가 二품에 수가 八순이 넘고 성망이 한 고을에 가득하니 자못 「맹자(孟子)」 이른바, 『조정에서 벼슬이 높고 고을에서는 치·덕이 높으며 세상에서는 덕망이 높은 三달존(三達尊)의 군자』이시도다. 마음을 공경으로서 정하고 몸을 예로서 다스리며, 물건을 양을 헤아려 쓰고, 일을 기틀을 살려 괴하시니 부군의 성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참으로 이 세상에 드문 자질이었다. 아! 상해가 변하고 천륜이 퇴패한데, 만일 이제 천양하지 못하면 마침내 래세에 전한 것이 없을까 두려워하고, 알지 못하여 밝지 못한 훈계나마 저버림이 될까 두려워, 감히 뜰을 지나며 보고 들은 만에 하나를 기술하니 오직 붓을 잡은 군자는 가려서 수윤(修潤)하여 주실것을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비는 바이다. 증손남(曾孫男) 양훈(亮勳)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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